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처음 본 건 중학생 때였다.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 줄거리도, 인물도 흐릿하게 남아 있지만
처음 봤을 때의 기분은 또렷하다. 주황색 비니를 쓴 시니컬한 남자(해양
다큐멘터리 감독이다)가 자신의 촬영 크루와 함께 복수심으로 똘똘 뭉쳐
동료를 죽인 재규어 상어를 찾아 바다를 떠돈다. 플롯의 흐름은 불명확했고, 대사는 무심했으며, 기묘한 색감이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그 어정쩡하고 자유로운 감정이 좋았다. 자신의 배와 잠수정을 가진채
동료들과 바다를 떠돌 수 있는 사람의 이야기. 아마 그때부터 웨스 앤더슨이라는 이름이 좋아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종강은 언제나 천천히 적셔지듯 다가온다. 수업마다 시험이나 과제가
하나씩 끝나면서 시간표가 비워지고, 바삐 돌아가던 일상은 조금씩 느려진다. ‘오늘 해야 할 일들’이 줄어들고, 사라진 자리에 일정 없는 하루 이틀이
채워지기 시작하며 어느순간 방학을 맞이한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전시준비와 공모전, 그리고 방학까지 이어지는
교내·외 활동들이 줄줄이 엮인채 처리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쉬기로 정한 며칠이고, 쉬고 있는 중인데도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시간에 쫓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바쁘다고 여러 번 미뤄왔던 여행을 다녀왔다.
제주도까지 가서야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를 맞이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계획 없는 하루 위에 서니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천천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 여유로움 덕분에, 기억 뒤편으로 밀려 있던 영화들을 다시
꺼내볼 수 있었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도 그중 하나였다.

앤더슨의 영화는 항상 형식부터 들어온다. 혹자는 형식만 남았다고
평하기도 한다. 대칭 구도, 평면적인 카메라 무빙, 의도적으로 제한된 색감, 정지된 채 대사를 하는 인물등. 「애스터로이드 시티」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 속은 이전보다 더 복잡하게 짜여 있었다.
처음 극장에서 봤을 땐, 중반부까지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영화는 하나의 연극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이고, 동시에 그 연극 속 이야기를 보여주는 극중극이다. 관객은 현실과 허구 사이에서 헤매게 된다.
연극 속 무대는 1955년, 사막 한복판에 있는 가상의 도시
‘애스터로이드 시티’이다. 발명상 시상식을 위해 천재적인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들이 도시에 모인다. 겉보기엔 마냥 행복하고 동시에 단조로운 행사 같지만, 인물들은 어딘가 한 부분씩 결핍된 상태로 등장한다.
극의 주인공 오기는 아내의 죽음을 자식들에게 말하지 못했고, 여배우
미지 캠벨은 자신의 씁쓸한 감정을 오기에게 대사 연습하듯 털어놓는다.
그리고 UFO가 나타난다. 외계인은 아무런 설명 없이 내려와 운석을 가져가고, 도시 전체는 군의 통제로 격리된다. 정부 관계자들은 상황을 정리하려
하고 마을 주민 모두가 불편과 희생을 감수해 이 상황을 해결해야한다고
말한다. 정작 외계인은 인간보다 더 당황한 얼굴로 그 자리를 떠난다.
무슨 의도인 걸까? 극이 만들어진 배경인 1950년대 미국의 사회상?
냉전, 전체주의, 메카시즘에 대한 비판? 혹은 핵실험, 감시 사회에 대한
불안감을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말미,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오기 스틴백 역할을 맡은
배우 존스 홀은 무대 위에서 뛰쳐나와 연출가에게 묻는다.
“이 연극이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연출가는 대답한다.
“아주 잘하고 있어.”
“상관없어. 그냥 계속 연기해.”

연출가는 맡은 배역을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으니 그냥 계속하라고 말한다. 설명되지 않아도, 자신이 맡은 역할을 채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가지 못해도, 이야기는 계속되고 연극은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연출가는 이어서 말한다.
“너가 오기인지, 오기가 너인지 모르겠어.”
오기를 연기하는 존스 홀은 자신이 맡은 역의 행동(버너에 스스로 손을 가져다 댄 오기)을 지속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며 연극의 의미를 찾으려한다. 동시에 자신과 자신이 연기하는 등장인물을 헷갈려한다.
올해 초 겨울, 31기 전시를 준비하며 비비언 고닉의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라는 에세이를 읽었다.
고닉은 뉴욕 거리의 일상 풍경을 하나의 무대로 바라본다.
거리를 걷는 행인, 잡담을 주고받는 상인, 말없이 서 있는 사람까지
그들 모두가 관객 없는 연극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삶이란,
무대가 없는 곳에서도 멈추지 않는 퍼포먼스다. 우리는 매 순간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고 믿거나 믿지 않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을 연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인물들도 그렇다. 누군가는 자신의 감정을
대사처럼 되뇌고, 누군가는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
연기를 이어간다. 그러나 고닉이 말했듯, 삶은 완벽한 공연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누구도 멈출 수 없는 삶의 지속성 자체에 있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갑자기 등장한 외계인도,
버너에 손을 가져다 댄 오기도, 이해되지 않는 것 투성이인 전위극이다.
삶이라는 연극은 플롯이 완벽하고 기승전결의 일관성있는 이야기가
담겨있는 완결적인 연극이 아니다. 그리고 그래도 괜찮다.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고, 의미를 알지 못해도 괜찮고, 해석되지 않아도 괜찮다. 그럼에도,
역설적으로 우리는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 살아갈 수 있다. 결국 웨스 앤더슨은 애스터로이드 시티라는 작은 세계를 통해 삶이란 의미 없이도 지속될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의 서사이며 하나의 공연이다.
글쓴이_박재민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처음 본 건 중학생 때였다.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 줄거리도, 인물도 흐릿하게 남아 있지만 처음 봤을 때의 기분은 또렷하다. 주황색 비니를 쓴 시니컬한 남자(해양 다큐멘터리 감독이다)가 자신의 촬영 크루와 함께 복수심으로 똘똘 뭉쳐 동료를 죽인 재규어 상어를 찾아 바다를 떠돈다. 플롯의 흐름은 불명확했고, 대사는 무심했으며, 기묘한 색감이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그 어정쩡하고 자유로운 감정이 좋았다. 자신의 배와 잠수정을 가진채 동료들과 바다를 떠돌 수 있는 사람의 이야기. 아마 그때부터 웨스 앤더슨이라는 이름이 좋아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종강은 언제나 천천히 적셔지듯 다가온다. 수업마다 시험이나 과제가 하나씩 끝나면서 시간표가 비워지고, 바삐 돌아가던 일상은 조금씩 느려진다. ‘오늘 해야 할 일들’이 줄어들고, 사라진 자리에 일정 없는 하루 이틀이 채워지기 시작하며 어느순간 방학을 맞이한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전시준비와 공모전, 그리고 방학까지 이어지는 교내·외 활동들이 줄줄이 엮인채 처리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쉬기로 정한 며칠이고, 쉬고 있는 중인데도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시간에 쫓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바쁘다고 여러 번 미뤄왔던 여행을 다녀왔다. 제주도까지 가서야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를 맞이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계획 없는 하루 위에 서니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천천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 여유로움 덕분에, 기억 뒤편으로 밀려 있던 영화들을 다시 꺼내볼 수 있었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도 그중 하나였다.
앤더슨의 영화는 항상 형식부터 들어온다. 혹자는 형식만 남았다고 평하기도 한다. 대칭 구도, 평면적인 카메라 무빙, 의도적으로 제한된 색감, 정지된 채 대사를 하는 인물등. 「애스터로이드 시티」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 속은 이전보다 더 복잡하게 짜여 있었다.
처음 극장에서 봤을 땐, 중반부까지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영화는 하나의 연극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이고, 동시에 그 연극 속 이야기를 보여주는 극중극이다. 관객은 현실과 허구 사이에서 헤매게 된다.
연극 속 무대는 1955년, 사막 한복판에 있는 가상의 도시 ‘애스터로이드 시티’이다. 발명상 시상식을 위해 천재적인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들이 도시에 모인다. 겉보기엔 마냥 행복하고 동시에 단조로운 행사 같지만, 인물들은 어딘가 한 부분씩 결핍된 상태로 등장한다. 극의 주인공 오기는 아내의 죽음을 자식들에게 말하지 못했고, 여배우 미지 캠벨은 자신의 씁쓸한 감정을 오기에게 대사 연습하듯 털어놓는다.
그리고 UFO가 나타난다. 외계인은 아무런 설명 없이 내려와 운석을 가져가고, 도시 전체는 군의 통제로 격리된다. 정부 관계자들은 상황을 정리하려 하고 마을 주민 모두가 불편과 희생을 감수해 이 상황을 해결해야한다고 말한다. 정작 외계인은 인간보다 더 당황한 얼굴로 그 자리를 떠난다.
무슨 의도인 걸까? 극이 만들어진 배경인 1950년대 미국의 사회상? 냉전, 전체주의, 메카시즘에 대한 비판? 혹은 핵실험, 감시 사회에 대한 불안감을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말미,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오기 스틴백 역할을 맡은 배우 존스 홀은 무대 위에서 뛰쳐나와 연출가에게 묻는다.
“이 연극이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연출가는 대답한다.
“아주 잘하고 있어.”
“상관없어. 그냥 계속 연기해.”
연출가는 맡은 배역을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으니 그냥 계속하라고 말한다. 설명되지 않아도, 자신이 맡은 역할을 채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가지 못해도, 이야기는 계속되고 연극은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연출가는 이어서 말한다.
“너가 오기인지, 오기가 너인지 모르겠어.”
오기를 연기하는 존스 홀은 자신이 맡은 역의 행동(버너에 스스로 손을 가져다 댄 오기)을 지속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며 연극의 의미를 찾으려한다. 동시에 자신과 자신이 연기하는 등장인물을 헷갈려한다.
올해 초 겨울, 31기 전시를 준비하며 비비언 고닉의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라는 에세이를 읽었다.
고닉은 뉴욕 거리의 일상 풍경을 하나의 무대로 바라본다.
거리를 걷는 행인, 잡담을 주고받는 상인, 말없이 서 있는 사람까지 그들 모두가 관객 없는 연극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삶이란, 무대가 없는 곳에서도 멈추지 않는 퍼포먼스다. 우리는 매 순간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고 믿거나 믿지 않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을 연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인물들도 그렇다. 누군가는 자신의 감정을 대사처럼 되뇌고, 누군가는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 연기를 이어간다. 그러나 고닉이 말했듯, 삶은 완벽한 공연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누구도 멈출 수 없는 삶의 지속성 자체에 있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갑자기 등장한 외계인도, 버너에 손을 가져다 댄 오기도, 이해되지 않는 것 투성이인 전위극이다.
삶이라는 연극은 플롯이 완벽하고 기승전결의 일관성있는 이야기가 담겨있는 완결적인 연극이 아니다. 그리고 그래도 괜찮다.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고, 의미를 알지 못해도 괜찮고, 해석되지 않아도 괜찮다. 그럼에도, 역설적으로 우리는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 살아갈 수 있다. 결국 웨스 앤더슨은 애스터로이드 시티라는 작은 세계를 통해 삶이란 의미 없이도 지속될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의 서사이며 하나의 공연이다.
글쓴이_박재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