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축의 시작]
최근 실내 건축디자인학과에서 건축학부로 전과하며 일종의 새로운 시작을 하였다. 아무런 생각 없이 새로운 시작을 한 것은 아니지만 생각보다는 다른 건축학과에서의 프로젝트 접근 방식과 수업에 약간은 당황하였고 이에 대한 생각을 하며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 과정 속에 과연 나의 건축은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며 최근 인상 깊게 보았고 탐구하고 있는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나 또한 건축에 관심을 지닌 이후로 꽤 오랜 시간 그래왔지만,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건축이 하나의 '형태'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처음 떠오른 이미지, 입면의 인상, 덩어리의 매스감'이 설계의 출발점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오답은 아니지만 가끔은 건축을 지나치게 결과 중심적 혹은 직관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스탠 앨런에게 시작은 형태의 탄생이 아니라 형태가 발생할 수 있는 관계의 규칙이 설정되는 순간에 더 가까우며 건축의 시작은 조형적 상상보다 먼저 오는 어떤 조직의 논리이다. 앨런이 말한 prescriptive diagram은 바로 그 논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개념이라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다이어그램은 묘사나 설명의 도구로 이해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다이어그램은 동선을 정리하거나, 프로그램의 분포를 분석하거나 이미 설계된 공간을 요약하여서 한눈에 보기 쉽게 하여 이해를 돕는 그림이다. 그러나 앨런에게 중요한 다이어그램은 이런 descriptive 한 도식이 아니다. 그가 강조하는 다이어그램은 이미 존재하는 건축을 해설하는 장치가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건축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이다. Diagrams Matter에서 앨런은 다이어그램을 단순한 재현이 아닌 작동하는 추상적 메커니즘으로 본다. 따라서 다이어그램은 형태를 닮아야 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형태를 직접 보여주지 않을수록 더 근본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보는데 이는 다이어그램의 역할은 보이는 모습을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관계를 조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prescriptive diagram은 스케치와 구별되는데 스케치가 종종 어떤 이미지를 향한 직관적 접근이라면 prescriptive diagram은 이미지 이전의 질서를 세운다. 여기서 다이어그램이 다루는 것은 외벽의 모양이나 천장의 형식이 아니라 프로그램 사이의 거리와 충돌, 사람들의 이동 경로, 서로 다른 사건이 만나는 방식, 반복과 변형의 규칙 같은 것이다. 이것은 형태를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형태가 어떤 논리로 생겨날지에 대한 명령문에 가깝기에 prescriptive diagram은 결과를 직접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결과를 강하게 방향 짓는다. 건축의 시작은 어떠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순간이라기보다 이런 규칙이 처음으로 세워지며 이를 바탕으로 컨셉에 대한 아이디어가 탄생하고 이를 기반으로 발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앨런의 다이어그램 개념이 더 중요해지는 것은 그것이 그의 필드 컨디션의 개념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From Object to Field에서 그는 건축을 하나의 독립적 오브제로 이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부분들이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내는 장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본다. 여기서 필드는 단순히 넓은 공간을 뜻하지 않으며 그것은 개별 요소들이 하나의 전체 형상에 종속되기보다 서로의 인접성과 차이, 반복과 리듬을 통해 전체를 형성하는 상태를 뜻한다. 따라서 필드 컨디션에서 중요한 것은 전체 형상의 완결성이 아니라 부분들 사이에 작동하는 관계의 체계다. 이때 다이어그램은 그러한 관계를 미리 조직하는 도구가 되며 단순한 시각 자료를 넘어선 객체 중심의 건축을 관계 중심의 건축으로 전환시키는 사고의 형식이 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시작은 더 이상 완성된 형태의 첫 순간이 아니고 오히려 시작은 아직 형태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후의 전개를 가능하게 할 규칙이 태어나는 순간이다. 어떤 프로그램이 서로 가까워져야 하는지, 어떤 흐름이 충돌해야 하는지, 어디서 사건이 축적되고 어디서 밀도가 완화되어야 하는지 같은 문제들이 먼저 설정될 때 건축이 시작하는 느낌이다. 이 점에서 prescriptive diagram은 건축 이전의 하나의 그림이 아니라 이미 건축 자체의 일부다. 이는 나의 건축을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이해하게 만들어 주는 듯하다.


이러한 사고는 정말 유명한 건축가 렘 쿨하스의 작업에서 또한 드러난다. 그의 건축은 형태를 고정된 조형 오브제로 다루기보다 프로그램과 사건, 도시적 흐름이 충돌하는 체계로 다뤄진다. 그중에서도 시애틀 중앙 도서관은 다이어그램이 어떻게 실제 건축의 시작점이 되는지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준다. OMA는 이 프로젝트에서 도서관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다섯 개의 플랫폼과 네 개의 유동적 공간으로 조직했고 바로 그 조직이 건물의 특유한 입체 형상을 결정한다고 설명한다. 시애틀 공공도서관 역시 이 건물의 비대칭적 형상이 서로 다른 프로그램 클러스터와 플랫폼의 중첩에서 비롯되었다고 소개한다. 이 프로젝트의 형태는 처음부터 조형적으로 상상된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적 관계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라는 다이어그램 적 판단에서 나온 결과다.
시애틀 중앙 도서관이 흥미로운 이유는 여기서 다이어그램이 단순한 분석 단계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은 층별로 나뉘어 들어간 기능표가 아니라 공간적 성격에 따라 안정적인 영역과 보다 유동적인 영역으로 분절되고 재결합된다. 그 결과 건물 내부의 Book Spiral, Mixing Chamber, Living Room 같은 장치들은 단순한 방의 이름이 아니라 정보와 이동, 체류와 사건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조직되는 공간적 조건이 된다. 이 건물에서 건축은 더 이상 단일한 중심을 가진 조형이 아니라 서로 다른 프로그램적 힘들이 잠정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장이 되며 둘 다 건축을 무엇처럼 보이는가보다. 어떻게 조직되는가의 문제로 다룬다는 점에서 쿨하스의 건축은 앨런의 이론과 만나는 지점이 있다.
결국 내가 생각하는 시작은 단순히 맨 처음의 순간이 아닌 아직 아무것도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후의 전개를 결정할 관계가 설정되는 순간인 것 같다. 그 시작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만들어내며 이는 물리적인 형태가 아닌 구조로 구체화된다. 앨런의 prescriptive diagram은 이러한 개념의 시작을 가장 건축적으로 흥미롭게 설명해 준다. 건축은 어떤 이미지를 닮기 위해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사이트 안에서 사용자들의 프로그램과 움직임, 사건과 밀도의 관계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라는 문제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쿨하스의 작업은 그 생각이 실제 건축안에서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나에게 건축의 시작은 하나의 선명한 형태가 아니라 형태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의 구체화인 것 같다.
글쓴이_이하람
[건축의 시작]
최근 실내 건축디자인학과에서 건축학부로 전과하며 일종의 새로운 시작을 하였다. 아무런 생각 없이 새로운 시작을 한 것은 아니지만 생각보다는 다른 건축학과에서의 프로젝트 접근 방식과 수업에 약간은 당황하였고 이에 대한 생각을 하며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 과정 속에 과연 나의 건축은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며 최근 인상 깊게 보았고 탐구하고 있는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나 또한 건축에 관심을 지닌 이후로 꽤 오랜 시간 그래왔지만,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건축이 하나의 '형태'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처음 떠오른 이미지, 입면의 인상, 덩어리의 매스감'이 설계의 출발점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오답은 아니지만 가끔은 건축을 지나치게 결과 중심적 혹은 직관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스탠 앨런에게 시작은 형태의 탄생이 아니라 형태가 발생할 수 있는 관계의 규칙이 설정되는 순간에 더 가까우며 건축의 시작은 조형적 상상보다 먼저 오는 어떤 조직의 논리이다. 앨런이 말한 prescriptive diagram은 바로 그 논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개념이라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다이어그램은 묘사나 설명의 도구로 이해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다이어그램은 동선을 정리하거나, 프로그램의 분포를 분석하거나 이미 설계된 공간을 요약하여서 한눈에 보기 쉽게 하여 이해를 돕는 그림이다. 그러나 앨런에게 중요한 다이어그램은 이런 descriptive 한 도식이 아니다. 그가 강조하는 다이어그램은 이미 존재하는 건축을 해설하는 장치가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건축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이다. Diagrams Matter에서 앨런은 다이어그램을 단순한 재현이 아닌 작동하는 추상적 메커니즘으로 본다. 따라서 다이어그램은 형태를 닮아야 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형태를 직접 보여주지 않을수록 더 근본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보는데 이는 다이어그램의 역할은 보이는 모습을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관계를 조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prescriptive diagram은 스케치와 구별되는데 스케치가 종종 어떤 이미지를 향한 직관적 접근이라면 prescriptive diagram은 이미지 이전의 질서를 세운다. 여기서 다이어그램이 다루는 것은 외벽의 모양이나 천장의 형식이 아니라 프로그램 사이의 거리와 충돌, 사람들의 이동 경로, 서로 다른 사건이 만나는 방식, 반복과 변형의 규칙 같은 것이다. 이것은 형태를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형태가 어떤 논리로 생겨날지에 대한 명령문에 가깝기에 prescriptive diagram은 결과를 직접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결과를 강하게 방향 짓는다. 건축의 시작은 어떠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순간이라기보다 이런 규칙이 처음으로 세워지며 이를 바탕으로 컨셉에 대한 아이디어가 탄생하고 이를 기반으로 발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앨런의 다이어그램 개념이 더 중요해지는 것은 그것이 그의 필드 컨디션의 개념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From Object to Field에서 그는 건축을 하나의 독립적 오브제로 이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부분들이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내는 장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본다. 여기서 필드는 단순히 넓은 공간을 뜻하지 않으며 그것은 개별 요소들이 하나의 전체 형상에 종속되기보다 서로의 인접성과 차이, 반복과 리듬을 통해 전체를 형성하는 상태를 뜻한다. 따라서 필드 컨디션에서 중요한 것은 전체 형상의 완결성이 아니라 부분들 사이에 작동하는 관계의 체계다. 이때 다이어그램은 그러한 관계를 미리 조직하는 도구가 되며 단순한 시각 자료를 넘어선 객체 중심의 건축을 관계 중심의 건축으로 전환시키는 사고의 형식이 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시작은 더 이상 완성된 형태의 첫 순간이 아니고 오히려 시작은 아직 형태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후의 전개를 가능하게 할 규칙이 태어나는 순간이다. 어떤 프로그램이 서로 가까워져야 하는지, 어떤 흐름이 충돌해야 하는지, 어디서 사건이 축적되고 어디서 밀도가 완화되어야 하는지 같은 문제들이 먼저 설정될 때 건축이 시작하는 느낌이다. 이 점에서 prescriptive diagram은 건축 이전의 하나의 그림이 아니라 이미 건축 자체의 일부다. 이는 나의 건축을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이해하게 만들어 주는 듯하다.
이러한 사고는 정말 유명한 건축가 렘 쿨하스의 작업에서 또한 드러난다. 그의 건축은 형태를 고정된 조형 오브제로 다루기보다 프로그램과 사건, 도시적 흐름이 충돌하는 체계로 다뤄진다. 그중에서도 시애틀 중앙 도서관은 다이어그램이 어떻게 실제 건축의 시작점이 되는지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준다. OMA는 이 프로젝트에서 도서관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다섯 개의 플랫폼과 네 개의 유동적 공간으로 조직했고 바로 그 조직이 건물의 특유한 입체 형상을 결정한다고 설명한다. 시애틀 공공도서관 역시 이 건물의 비대칭적 형상이 서로 다른 프로그램 클러스터와 플랫폼의 중첩에서 비롯되었다고 소개한다. 이 프로젝트의 형태는 처음부터 조형적으로 상상된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적 관계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라는 다이어그램 적 판단에서 나온 결과다.
시애틀 중앙 도서관이 흥미로운 이유는 여기서 다이어그램이 단순한 분석 단계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은 층별로 나뉘어 들어간 기능표가 아니라 공간적 성격에 따라 안정적인 영역과 보다 유동적인 영역으로 분절되고 재결합된다. 그 결과 건물 내부의 Book Spiral, Mixing Chamber, Living Room 같은 장치들은 단순한 방의 이름이 아니라 정보와 이동, 체류와 사건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조직되는 공간적 조건이 된다. 이 건물에서 건축은 더 이상 단일한 중심을 가진 조형이 아니라 서로 다른 프로그램적 힘들이 잠정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장이 되며 둘 다 건축을 무엇처럼 보이는가보다. 어떻게 조직되는가의 문제로 다룬다는 점에서 쿨하스의 건축은 앨런의 이론과 만나는 지점이 있다.
결국 내가 생각하는 시작은 단순히 맨 처음의 순간이 아닌 아직 아무것도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후의 전개를 결정할 관계가 설정되는 순간인 것 같다. 그 시작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만들어내며 이는 물리적인 형태가 아닌 구조로 구체화된다. 앨런의 prescriptive diagram은 이러한 개념의 시작을 가장 건축적으로 흥미롭게 설명해 준다. 건축은 어떤 이미지를 닮기 위해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사이트 안에서 사용자들의 프로그램과 움직임, 사건과 밀도의 관계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라는 문제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쿨하스의 작업은 그 생각이 실제 건축안에서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나에게 건축의 시작은 하나의 선명한 형태가 아니라 형태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의 구체화인 것 같다.
글쓴이_이하람